출산 후 단기 기억 상실증은 첫째 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단어도 자꾸 생각이 안나고 열심히 외웠던 단어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고.
그리하여, 기억이 더 날아가기 전에 출산후기에 이어 병원에서 지낸 기간동안의 일들을 정리해보렵니다!
아이 출산 직후 캥거루 케어 시간을 충분히 가진 산모는 휠체어에 앉아 병실로 이동하게 되는데요
(휠체어가 있음에도 분만실 이동시 걸어가라고 했던 것이 다시 생각나며 울컥하네요),
이때 아이는 엄마 무릎에 함께 안고 갑니다.
병실은 이 사진에서처럼 산모 침대, 그리고 투명한 아기 침대가 나란히 놓여 있어요.
떨어질레야 떨어질 수 없는 자석과 철가루의 관계랄까요.ㅎㅎㅎ
즉, 병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엄마의 육아는 시작됩니다. 두둥~
프랑스 병원에서 출산까지의 과정도 사전에 세세하게 알아보지 못했지만
병실 생활에 대해서 역시 찾아본 정보가 없었기에 첫째 때(미국)와 어떻게 다를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이어가기 앞서 한가지 언급할 점은,
프랑스가 워낙 '싸데펑'의 나라이기 때문에 저의 경험이 전체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그 병원에서 저 혼자만 겪은 일일지도 몰라요.
그 정도로 이곳은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매우 많은 나라입니다.
때문에 저도 앞서 출산을 경험한 이웃들을 통해 이곳 진료진들이 자연주의 출산을 매우 선호한다는 이야기
(프랑스에서는 역아도 별다른 이상이 없으면 자연분만을 하게 합니다)와
모유수유에 대해 상당히 강조한다는 점 정도만 인지하고
어떤 일들이 펼쳐질 지에 대해 예상하기 어려웠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출혈 등 출산 조짐으로 병원에 짐을 싸들고 갔던 월요일 저녁부터 퇴원한 토요일 오후까지
산부인과 의사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출산 과정에는 의사가 들어올 것이라고 생각했던 저는 진통이 본격화되기 직전,
산파에게 "의사는 언제 오니?" 하고 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프랑스에서는 특별히 이상이 없는 한 우리가 모든 과정을 담당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의사는 후처리가 마무리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고
출산 후 저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서도 오지 않았습니다. (소오~~름ㅋ)
출산에 투입된 병원 스텝도 산파 두명이 전부. 한명은 제가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부터 저를 담당했던 사람이고
또 한명은 아이 출산 이후 아이의 몸무게 체크 등을 해주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출산 이후 산부인과 의사가 방문해 저의 상태를 따로 체크하고
마취과 의사가 방문해 무통주사에 따른 부작용은 없는지를 확인했습니다.
소아과 의사도 아이 상태를 지속적으로 체크했고요.
하지만 제가 경험한 프랑스 병원의 경우 퇴원까지 산파들이 담당하는 역할이 90% 이상이었습니다.
소아과 의사도 퇴원을 위한 확인 절차에서 두차례 만난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산모가 이상 증세를 호소하지 않는 이상 정상적인 상태로 간주하고 기본적인 혈압과 체온만 체크하더군요.
퇴원이 가까워지면서 프랑스 출산병원이 정말 '병원'이 아니라
옛날에 집에서 출산시 산파가 방문해서 아이를 받았다면
이곳은 산파들이 모인 곳에 산모가 와서 아이를 낳는 정도의 차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사실 병원에 머무는 동안 제가 가장 힘들었던 것은 모유수유에 대한 산파들의 상당한 집착과 달리
허술했던 가이드라인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병실을 찾은 산파는 제가 모유수유를 할 것이라는 말에 당연한 일이란 반응을 보이며
최대 4시간 간격 이내에 수유를 해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주었습니다.
큰 아이때 2시간 간격으로 물렸던 경험이 있었지만 예상보다 긴 시간 텀을 이야기해서 그래야 하나 하고 생각할 즈음,
다른 산파가 방문해 2시간에서 3시간 간격을 넘기지 말라고 하더군요.
제가 익숙한 2시간 간격이라는 말을 했기에 이를 기준으로 생각했는데
병실별로 담당 산파가 배정되는 시스템이 아닌 것인지 4일째가 되는 날까지도 교대 시간이 경과하고 나면
매번 새로운 산파가 등장해 새로운 이야기를 하며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만 3일째 아침까지 모유가 잘 돌지 않고 아기의 몸무게가 출생 당시보다 0.3kg 감소하면서
상황은 더 극적으로 흘러갔습니다.
산파들의 가이드라인은 더 뒤죽박죽이 되기 시작했던거죠.
제 수유간격을 매번 기록해서 달라는 산파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유축기를 들고 와서 수유 후 유축도 병행하라고 하고,
어떤 이는 엄마가 쉬어야 모유도 돈다며 쉴 것을 권장했습니다.
2시간 간격으로 수유하고 유축하고 화장실 다녀오면 다시 수유시간이 되는 무한반복 패턴에서
먹기도 하고 쉬기도 하고 자기도 하며 모유를 열심히 만들어야 한다니
새벽 출산 이후 한두시간도 제대로 못자고 있는 제게는 정말 고마운 조언들이었습니다.
서서히 몸도 정신도 바닥을 치기 시작해 퇴원은 언제 가능하냐고 물었는데
아이 체중이 늘어나는 것을 확인해야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제가 혹여 퇴원해서 제 아이를 굶게 할까 그런가... 과한 친절에 감동이 ㅎㅎ
그리고 그날 저녁, 또 다른 산파가 오더니 아이가 너무 배고프면 안 되니 소량의 분유를 주는 것이 어떠냐고 하더군요.
그래도 괜찮겠냐고 했더니 10ml 정도를 주며 아이의 허기를 달래는 것은
모유수유에 지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서서히 배고픔에 힘들어하는 아이를 보고 그러겠다고 답하고 그 산파가 담당하는 시간동안 2회 총 20ml를 먹였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여지없이 다른 산파가 들어왔는데 그는 "분유 먹이는 것 괜찮지?" 하며
젖병에 아예 분유를 담아서 들어오더군요.
젖병을 정확히 보진 못했지만 얼추 보더라고 30ml는 되어 보였습니다.
다시 저녁. 수유와 유축, 수시로 바뀌는 산파 행렬에 지친 저는 퇴원 욕구가 심히 강해지면서
어떻게든 아이 무게를 늘리는 것이 살길이라고 결론내렸습니다.
저녁 근무시간에 새로 찾은 산파에게 "분유를 줘도 되니?" 라고 묻자 그는 흔쾌히 약상분유를 가져다주더군요.
"얼마나 먹이면 되니?"하고 물었더니 이 산파는 "아이가 원하는 만큼 줘"라는 세상 쿨한 답을...
혹시 모유수유가 실패할까 싶어 "그래도 되니?" 하자 "물론. 아이가 원하는 만큼 먹여" 라고 확인해줬습니다.
죽어라 모유를 짜낼 것을 강조할 때는 언제고 왜들 이러나 싶다가
일단 나가고 보자는 생각에 아이의 입에 젖병을 물렸습니다.
그리고, 아이는 70ml를 시원하게 원샷했습니다.
산파가 다시 찾아 얼마나 먹였느냐고 체크할까봐 조마조마했는데 그 산파는 다시 병실에 들어오지 않더군요.
프랑스 출산병원 퇴원의 조건은 세가집니다.
1. 아이의 체중 증가 2. 아이의 황달 수치 정상 3. 산모 상태 정상
1번과 2번이 퇴원의 기준이 되는 이유는 이해되지 않지만(똑같이 자연분만했던 큰 아이의 경우 출산 후 2박 3일만에 퇴원, 일주일 후 재방문을 통해 몸무게와 황달 수치를 확인했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액상분유에 힘입어 퇴원, 아니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생각할수록 억울했습니다.
적어도 병원 안에 존재하는 가이드라인이 있어 전문가들이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과는 너무 달랐고
산모에 대해 지속적으로 상태를 관찰하며 확인하는 의사가 끝까지 없었다는 점도 실망스러웠습니다.
물론 이곳 출산병원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은 탓도 있겠죠.
하지만 출산 과정에서도, 출산 후 회복 과정에서도 산모로서 전혀 배려받지 못했다는 느낌 속에
오로지 모유수유, 그마저도 일관성 없는 조언들에 휘둘려 멘붕을 겪은 상황에서는
지칠 수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를 안고 병원을 나서며 저는 중얼거렸습니다.
'수유시간에 대한 정확한 안내는 끝까지 듣지 못하고 가는구나. 잘 있어라. 나는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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